강산의 빛바램
확실성에 대하여: 학습 철학의 관점
마지막을 향하여 - 기본으로의 회귀
저자: 병든 철학자
스승의 확신 - 제자의 의심 (출처)
"법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토라의 권위는 토라를 배우는 것에서 나온다. 배우지 않은 법은 법이 아니다. 언어가 아닌 학습이 우리의 인식 밑에 있는 기초이며, 인간과 현실을 연결하는 형태이다. 또는 더 발전된 세계에서는 - 우리의 사고 밑에 있는 기초이다. 질문은 항상 어떻게 무언가를 배우는가이다. 이것이 깊이로 가는 길이다. 수학의 권위의 근원 대신에 - 어떻게 수학을 배우는가? 이것이 또한 유대교의 권위의 근원이다. 법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며 - 전통도 아닌 - 학습이다.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신 - 이것이 신의 정의이다. 스승들의 스승. 과학의 모든 힘과 효율성은 오직 학습으로부터 나온다. 유대교는 위대한 학습의 종교이다 - 세상에서 가장 길고 깊은 학습" (스승의 말씀).

모든 체계의 권위는 그것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학습에서 나오지 않는 독립적인 권위는 없다. 예를 들어, 감각이나 이성에는 독립적인 권위가 없다. 국법이나 도덕법도 마찬가지다. 밑에 있는 어떤 근본적인 논리나 정의는 없으며, 모든 것은 배워진다. 사고도 배워진다. 따라서 시작할 수 있는 0점이란 없다. 예를 들어 수학의 권위와 정당성의 근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수학을 배우는 것이다. 수학은 거기서 나오며, 학습을 통하지 않는 다른 권위의 근원은 없다. 그것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이성도 배워진다, 유아기에서든, 아동기에서든, 또는 그 이전에 - 유전자로서, 진화를 통해서. 학습에는 결코 시작점이 없으며, 따라서 학습을 넘어선 답은 없다. 왜라고 물으면, 결국에는 '이렇게 배웠다' 또는 '이렇게 가르쳐줬다'에 도달한다. 배운 것이나 가르침 받은 것 밑으로 파고들더라도, 그것 역시 그것을 배웠거나 가르침 받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도 배워진다. 모든 사고는 배워진다. 법 아래에는, 모든 가능한 법, 국법이든 수학의 법칙이든 토라의 법이든 - 학습이 있다. 우리는 학습 안에 있으며 그것 없이는 세상에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학습 체계도 - 이는 세상의 모든 발전된 체계이다 - 학습 외부의 세상에 접근할 수 없다. 학습 외부의 어떤 아르키메데스적 점이나,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기본적인 토대에도 접근할 수 없다. 실재나 물자체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는 문제는 학습의 스크린 뒤에 갇힌 인간만의 특별한 특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 우선, 이것은 우리와 세계 사이에 있는 스크린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기반이다. 즉, 우리는 배우지 않은 내면의 사고도 없다는 것이다. 즉, 이는 스크린보다는 바닥에 가깝고, (우리가 학습이라는 바닥 위에 서서 그것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그 안에서 헤엄치는 물과 같다 (하지만 이것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 안에 물의 일부가 아닌 내적 본질 - 물고기의 내부 - 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정확한 표현은 그것이 우리의 골격이고, 우리의 본질이며, 우리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이다 - 우리는 학습이다.

나) 이것은 전혀 인간의 조건에서 나오는 특성이 아니며, 인간을 구별 짓고 세상에서 독특한 현상으로 만드는 어떤 것도 아니다. 이는 모든 학습 체계의 특성이다. 모든 학습 체계들은 (예를 들어 경제, 토라, 또는 문화를 포함하여) 그들의 학습적 본질 안에 갇혀 있다. 인간은 단지 특별히 독특하지 않은 학습 체계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학습 철학은 인공지능이나 외계인에게도 적용된다 - 모든 학습 체계에 적용된다. 그리고 완전히 열린 학습 체계에도 - 예술과 같은. 여기에는 우리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캡슐 안에 있다는 느낌이 없다.

따라서 단지 시작 조건일 뿐이고, 세상 밖의 문제들만 다루며, 따라서 세상에서 실질적 의미가 없는 철학들과는 달리, 학습은 단지 틀이나 기초나 상부구조가 아니다. 학습은 내적 메커니즘이고 내적 의지이며 내적 동기이다. 정확히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불렀던 내적 에너지처럼, 다만 그것이 악한 것으로 특징지어지지 않는다 - 또는 니체처럼 권력에의 의지로도 - 대신 학습으로: 학습에 대한 의지, 그리고 학습의 형태로 행동하는 것. 학습은 (예를 들어 세상에 외적인 인식이나, 언어와 같은 외적 틀과는 달리) 세상 안에 있는 것을 특징짓는다. 가장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수준에서 매일매일 사물들이 실제로 작동하고 내부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 그것은 자연법칙이나 종교에 따른 토라의 법처럼 세상 안에 있다. 이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은 학습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습에서 벗어나거나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의 실제 의미는 무엇인가? 학습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명확성은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그것은 단지 행동, 계산, 또는 사고가 아니라 - 학습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소통, 논리, 감각이나 인식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학습이다. 따라서 그것에는 발전, 단계성, 구축, 관심, 방향 등이 있다 - 그리고 따라서 그것은 네 가지 학습 원칙에도 부합한다.

"모든 것이 학습이다"라는 이해는 공허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식적 오류로부터 구할 뿐만 아니라 학습을 집중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달한다. 학습은 우리가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잘못된 그림을 가지고 있다면 비효율적으로 진행되거나 전혀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차 선로의 마지막 역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했거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학습의 진보는 선로를 따라가는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방향으로 분기될 수 있고, 끝이 없으며, 넓은 전선에서 진보하고, 때로는 뒤로 돌아가 변화하기도 한다. 학습에는 또한 구축이 있지만, 그것은 구조를 만들지 않는다 - 그리고 어떤 철학적 이미지들처럼 층층이 쌓이는 건물이 아니라 - 오히려 유기적 발전에 더 가깝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과 시스템에 대한 올바른, 학습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혁신을 찾고 (창의성 장려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학습과 직접 관련된 모든 것에 투자하고 (투자라는 개념 자체가 학습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자기 학습과 학습 자료와 교육과 학습 시스템에, 그리고 다양한 학습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시도해보는 것 (경쟁, 다양성, 변이, 과거의 모범 사례, 시스템의 학습 역사 기억 등).

왜 수학이 정확한가? 그것의 학습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컴퓨팅은 수학적 학습이 충분한 정확성을 달성한 후 (프레게) 이 정확성을 기계화하려는 시도였다 - 이것이 그것의 성공의 이유이다. 특성이 학습에서 기계로 전달되었지만, 그것은 그것에 선행하는 학습에서 왔다. 예를 들어, 언어 법칙의 권위는 우리가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쳤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국법도 마찬가지다 - 우리는 복종을 배웠고, 그것은 법이 어딘가에 쓰여 있거나 그것의 정당성에 설득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법의 근원은 학습에 있다 - 수학적 법칙을 포함해서. 그리고 그것의 학습이 정확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수학적 법칙의 정당화 근원이 학습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다른 공리에서는 다른 법칙들이 나올 것이다. 수학의 역사를 통해 정확한 수학적 학습이 모순 없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많은 경우가 있었고, 그때 그것은 개선되었다 (때로는, 무한소 계산의 경우처럼 여러 세대가 걸렸다). 이는 모순이나 모호함이나 불완전성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는 불완전성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완전성에 대한 열망이 있고, 예를 들어 연속체 문제에서도 근거 있는 결정을 내리려는 열망이 있다).

학습은 법의 근원이지만 - 법이 나오는 0점은 아니다 -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이 개념이기 때문이다: 0점이 없다는 것. 학습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학습은 이전 학습에 의존한다. 심지어 생명의 시작, 진화 이전이라고 생각되는 시점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분자만 남는 학습 과정에 의존하고, 그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원소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행성들과 별들과 은하들 - 우주의 시작에는 생명이 없었고, 우주는 결국 생명이 생기는 발전을 거쳤다. 하지만 발전은 학습과 동일하지 않으며, 물리학은 아직 우주의 발전이 학습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이해해야 한다. 생명이 변칙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의 시작이 학습의 시작이라고 해도, 우리는 생명과 학습이 시작된 그런 특정한 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그것은 적응적 과정이었고, 아마도 물리적 요소들을 가진 (자발적 질서와 자기 조직화), 자연 자체의 법칙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자연법칙의 근원이 물리적 학습 과정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에게 있어 과학은 학습 과정이며, 우리에게 이러한 법칙들의 존재는 오직 그것들을 배우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연법칙의 목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인식에서 그것들의 근원은 학습이다. 그리고 이는 긴 그리고 끝나지 않은 학습 과정이며, 그 안에서 자연법칙은 많은 공식화를 거친다. 아마도 아이의 뇌에 배선된 직관적 이해에서부터 점점 더 추상적인 수학적 공식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접근하고 결국 도달할 진정하고 최종적인 자연법칙의 공식화는 없다. 대신 이는 학습 과정이다. 물리학 법칙은 문법 규칙이나, 사고의 법칙이나, 수학처럼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다. 이 모든 경우에 실천으로부터 법칙을 찾아내고 - 쓰는 데 - 엄청난 학습적 노력이 투자된다 - 이는 진보는 있지만 끝은 없는 노력이며, 정확히 학습처럼.

왜? 내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증이 아니지만, 정당화 가치가 전혀 없는 단순한 설명도 아니다. 학습은 이 중간 영역이며, 그 안에는 방향성이 있다. 즉 특정 방향으로의 일종의 밀어냄이 있지만, 미는 자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미는 자로부터의 소외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외부의 미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동일시하는 추진력, 우리인 내적 추진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그렇게 배웠다'는 것은 '자연법칙이 내 뇌를 그렇게 작동시켰다'와 동일하지 않다. 여기에는 시스템 내부의 학습적 논증이 있으며, 이는 유효한 학습을 식별하고, 그것에 외부적인 논증이 아니다 (같은 뇌의 사고 논증 내에서 뇌의 물리적 작용에 관한 물리적 논증처럼: 어떤 범죄자도 물리 법칙 때문에 살인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배웠다'는 것은 학습을 학습 외부가 아닌 내부의 도구로 논증해야 한다: 학습 시스템의 일부인, 그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논증. 예를 들어 수학의 증명이나, 판결문의 판사의 논증이나, 과학적 논증 (또는 경제적, 미학적, 종교적 등) 같은 것이다. 하지만 끝없이 왜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결국에는 '내가 그렇게 배웠다'에 도달한다. 유치원에서 그렇게 배웠다. 교실에서 그렇게 배웠다.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쳐주셨다. 대학에서 우리를 그렇게 가르쳤다. 진화가 그렇게 배웠다. 경험에서 그렇게 배웠다. 법칙을 비판하고, 바꾸고, 거부하는 능력도 - 우리는 배웠다. 모든 것을 배웠다. 창의적이 되는 것도 - 배웠다.

이 "내가 그렇게 배웠다"는 상태는 그것을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 '내가 그렇게 배웠다'는 '그냥 그렇다'와 동일하지 않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법칙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운 법칙만을 허용한다. 우리는 법칙을 발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을 왜곡되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면 그 상태는 '내가 그렇게 배웠다'가 아니라 '잘못 배웠다'가 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법칙에 대해 학습적인 자유만을 허용할 것이다. 마치 할라하 [유대교 율법] 현자들이 신의 법을 무효화하는 학습적 자유는 없지만, 그것을 발전시키는 학습적 자유는 있는 것처럼. 누구도 안식일에 불을 켜는 것이 허용된다고 결정할 수 없지만, 전구를 켜는 것이 불의 파생물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법에서 발전된 학습에 따라 정리된다면 말이다. 모든 사람이 갑자기 성경의 '불'을 '고양이'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 언어 법칙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불'이 '고양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 즉,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작동한다. 어떻게 작동하는가? 어떻게 여전히 안식일이 있고,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는가? 학습이 작동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학습이 있으며, 그것이 법률 시스템과 같은 모든 작동하는 시스템의 기초이다. 학습의 성공은 그것이 작동할 것이라는 어떤 증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 실제로 시스템을 조직하는 것에서 나온다.

학습에서의 논증의 개념은 법률 시스템에서의 논증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므로, 우리는 법률 시스템을 학습 시스템의 비유로 사용할 수 있다 - 그 안에는 학습 논증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논증이든 발명할 수 있고, 임의성을 막을 것이 없어 보이며,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황에 도달할 것 같다. 현대 예술에서처럼, 그리고 당신이 누구길래 나에게 정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에는 많은 행위자들이 있고, 새로운 행위자들은 교육과 학습 과정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만약 누군가 임의적인 것을 말하려 하면 다른 행위자들이 그를 교정하고, 그가 계속 고집한다면 아마도 시스템에서 제외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들은 오히려 보수적이며, 임의적이지 않다. 그들 안에는 학습에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논증들이 있고, 혁신도 있지만, 모든 논증이 통과되는 것은 아니며 내부 비평 메커니즘이 있다. 학습에서도 마찬가지다. 뇌의 한 뉴런이 미쳐도, 또는 한 생각이 비논리적이어도, 그것들은 억제될 것이다. 전체 시스템이 임의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는 - 실제로 학습이 붕괴되며, 이는 광기, 자폐증 또는 치매의 상태이다. 과학 공동체 전체가 갑자기 마법을 믿기 시작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가능성이 낮으며,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 그들은 더 이상 과학 공동체가 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학습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즉, 그것은 작동한다 - "내가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학습을 벗어나면 - 학습은 없다.

학습은 정확히 이것에 의존한다 - 법칙의 유기적 발전. 그것은 예를 들어 사회적 또는 개인적 이유와 관련이 없지만, 그것들이 외부에서 내부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시스템을 바라보는 관점은 내부에서 - 학습 자체 내에서이다. 따라서 사회적 이유는 특정 판결에 유효하지 않을 것이지만, 법적 이유는 유효할 것이다. 이유는 학습의 내부 논증 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법에 따른 평등은 여성에 대한 평등을 수반하거나 법을 여성에게 평등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아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법과 무관하게, 또는 심지어 법에 반하여 변했기 때문에 이제 여성에게 평등이 있을 것이다. 학습적 논증은 학습 시스템 자체 내에서 나와야 하며, 그 안에는 학습 시스템으로서 발전과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논증들이 있다. 과학은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능력 평등이 있는지를 내부적으로 증명해야 하며, 도덕적 또는 법적 학습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내부적인 과학적 논증이 필요하다. 수학도 물리적 논증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 특정 가설에 맞는 수십억 번의 숫자 실험을 수행하더라도, 여전히 수학은 증명을 요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학습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증명할 수 없는 이유는 수학이 논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 아니며, 판사가 법에 반하여 마음대로 판결을 내릴 수 없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법적 검토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수학에서도 우리는 구멍이 있거나 나중에 이해된 개념적 문제가 있는 증명을 만난다. 이는 학습 과정이다. 만약 시스템이 임의적인 논증을 허용한다면 - 그것은 학습 시스템이 아니다. 그러나 논증 형태의 발전은 임의적이지 않고 학습적이다. 과거에 유효하지 않았던 논증이 시스템에서 유효성을 얻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시스템이 모든 논증이 유효한 것으로 변한다면 - 그것은 더 이상 학습적이지 않다.

사실, 학습은 시스템을 학습적으로 유지한다 - 그 안에는 자기 보존 메커니즘이 있다. 그것은 항상 경계 상태에 있다. 어떤 시간을 초월한 논리적 논증이나 철학적 증명과 같이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없다. 마치 군대가 항상 국가를 억제하고 방어해야 하는 것처럼 - 왜냐하면 국가는 여기에 협정이나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억제력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법 검토나 과학적 검토가 항상 필요하다. 예를 들어 새로운 과학자나 판사를 항상 가르쳐야 한다. 항상 논쟁, 의견 차이, 고민이 있다 - 이런 것들이 없다면 아마도 학습이 없는 것이다. 학습은 기계적이지 않고, 여러 가능성이 있는 교차점이 있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모든 가능성이 아니다. 그리고 누가 가능성을 지키는가? 누가 그것을 지키는가? 그것 자체다. 뇌는 스스로 미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학습은 항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실패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안정적인 과정이 아니지만, 확실히 실패를 줄이고 자체를 안정화시킨다. 학습의 일부로서 - 유기적 발전, 즉 일종의 구축에 대한 경향 때문에, 설명되지 않은 도약에 대한 거부감, 자체 도구 내에서 논증의 필요성, 그리고 자체 비평 메커니즘 때문이다. 학습할 때는 연습, 시험, 질문, 과제, 훈련, 피드백 등이 있다. 항소 가능성이 있고 동료 평가가 있고 실험이 있고 문서화가 있고 절차가 있고 경쟁이 있고 평판이 있고 시장이 있다 등등. 내적 학습 충동은 학습 도구와 학습 보조 도구, 학습 구조를 통과하며, 이는 학습 경험의 일부로 학습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도구들은 선험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효율성에 대한 증명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고, 나중에 발전할 수 있는 다른 도구들이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그들은 임의적이지 않다. 학습 자체처럼.

학습은 발을 딛고 서서 논박할 수 없는 기초로 삼을 수 있는 최종적인 지반을 원하는 사람을 안심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해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배를 제공할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인 출발점을 만들어내지 않지만 진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많은 내부 제어 도구와 학습 도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왜 실제로 그러한 지반이나 그러한 척도가 없는지 설명할 것이다 - 왜 우리가 결코 우리의 학습 시스템이 영원히 작동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고, 항상 그것이 작동하도록 노력해야 하는지를. 아무도 결코 자신이 영원히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어떤 제국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수학도 흥미로운 모든 것이 알려지고 더 이상 흥미롭지 않은 상태에 도달하거나, 흥미로운 것의 상당 부분이 결정 불가능하거나, 대부분의 정리에 대한 증명이 추한 기술적이고 통찰력이 없거나, 해결책이 없는 개념적 오류에 빠지거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에 빠질 수 있다 - 왜냐하면 학습은 결코 예측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습의 개방성 자체로 인해 - 그 안에 실패가 있을 수 있다. 학습 실패 없는 학습은 불가능하다 - 그래서 항상 사후 지혜가 있을 것이며,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배운 후에는 항상 더 쉬워 보일 것이고, 학습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우리가 학습에 대한 외부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식론적 시대착오 현상과 이전의 학습 상태로 인식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능력, 심지어 자신의 것조차도, 그리고 확실히 역사에서 (예를 들어, 200년 전이나 2000년 전의 수학을 이해하거나, 종교를 이해하는 것) - 이것들은 학습이 일방향적이며 항상 자체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증거이다. 뒤로 갈 수 없다. 인간에서 원숭이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이는 양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논리적 증명과 같지 않다. 학습의 각 단계에서의 선택은 당시 시스템의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오늘날 당신은 이미 그것에 외부적이며, 특정 방향으로 발전하기 전이나 특정 아이디어를 알기 전에 어떻게 보였는지 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학습은 발전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특정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변화다. 우리 선조들의 마음에 들어가는 엄청난 어려움은 이루어진 길과 인식론적 진보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려움과 이루어진 길을 제대로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다 - 그것은 우리에게 쉽고, 당연하고, 명백해 보인다. 특정 학습 움직임을 하는 것이 사후에. 수학적 증명과 적절한 정의를 읽은 후에는 결코 이러한 정의를 찾는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미 자명한 것 뒤에 있는 엄청난 학습적 탐색을, 작동하지 않는 정의들 사이에서.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상태에서 우리의 상태로 가는 짧은 길만 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당연해 보이며, 미로에서 시행착오를 통해 얼마나 많은 추가 경로를 걸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논리적인" 길에 도달할 때까지. 이것이 논리의 본질이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며, 학습과는 대조적이다. 논리는 사후 학습의 지혜다. 나폴레옹이 겨울에 러시아를 정복하려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 우리는 그런 기본적인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논리다. 우리는 결코 진정한 혁명의 학습적 성취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예를 들어 과학 혁명.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외부적 관점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밤에 현명할 것이다.

그래서 학습의 개념 자체가 우리에게 당연해 보인다 - 오늘날까지, 우리 시대까지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단순한 아이디어다. 마치 우리가 그것으로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아이디어와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본능적인 학습의 개념은 (그들에게) 본능적이지 않았다. 철학의 가장 큰 성공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될 때이다 - 그리고 나서 당연한 것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그것은 이루어진 학습을 보여준다. 만약 언어 철학이나 인식론의 과거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혁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보수성과 화석화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한 것의 철학이 되기 전에. 학습의 개념은 너무나 기본적이어서 미래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그것이 너무 당연해질 것이기 때문에.

요약하면: 철학의 역사는 시스템의 기초를 그 외부에서 찾았다 - 어떤 것도 자체 내에서 증명할 수 없다 - 그리고 이로 인해 첫 번째 기초에 이르기까지 퇴행에 빠졌다. 학습은 그 안에서 사물을 기초지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것이 사소함을 초래하지 않는 이유는 기초 자체가 학습 방법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학습에서의 무한 퇴행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정상적이고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스템 내의 이전 학습 단계로의 퇴행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학습은 본질적으로 무한하다. 길은 여전히 앞으로 열리고 있다 - 선생님이 눈을 감을 때조차도. 선생님의 영혼을 높이는 것은 그가 정통성에서 방법론으로 변할 때이다 (그리고 그것을 죽이는 것은 - 반대로). 선생님이 내용에서 형식으로 변할 때, 그때 가르침이 생기고, 그의 영혼의 계승은 사람이 학습으로 변할 때이다. 이렇게 그는 영원한 삶을 얻는다. 만약 미래가 무한하다면, 학습에 한계가 없다면 - 과거가 유한할 이유가 없다. 증명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수학 자체에는 - 없다. 삶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 학습 자체에는 없다. 뇌는 태어나고 죽는다 - 그러나 생각 자체에는 시작점과 끝점이 없다. 정당화는 의로운 자 자신이다 - 길을 걸어가고 본보기를 보인 특별한 사람 - 그리고 길의 시작을 찾으려는 헛된 시도가 아니다. 그 길에는 시작도 없고 - 끝도 없다.
미래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