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종교적 꿈들
홀로코스트 이후의 종교 | 인간은 컴퓨터의 종교 | 페르미 패러독스에 대한 백신으로서의 종교와 인공지능의 동기 | 고대 예언을 실현하기 위한 메시아적 기술 | 하레디 사회 - 미래의 사회 | 세계 문화로의 유대교 사상의 다음 단계로서의 하시디즘 | 가상 인터넷 종교 | 종교의 미래이자 세속주의에 대한 승리로서의 예술 | 자살 편지
저자: 허무의 문턱
이 세상은 복도다 - 스승의 세계와 제자의 세계 사이의 [탈무드의 가르침]
(출처)-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오늘날 일본은 유대인들로 가득 찼을 것이고, 미국으로의 이민 이후에는 일본으로의 이민이 있었을 것이며, 창조의 충동이 허무의 충동 대신 그곳에서 맥동했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중국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은 인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서쪽 방향으로의 전 세계적 유대인 이주를 막았고, 따라서 그들이 가장 혁신적인 곳에서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을 막았다.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폴란드는 스타트업 국가였을 것이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서유럽에서도 기업가 정신이 번창했을 것이고, 미국은 훨씬 덜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분산된 유럽식 인터넷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미국식이 아니었을 것이며, 하나의 구글이나 하나의 페이스북이 아닌, 많은 다른 문화적 경쟁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 그리고 오늘날은 상상할 수 없는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를 고칠 수 있을까? 유전공학은 대량 학살에 대한 보상으로서 민족 부활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살해된 게놈을 부활시키고, 유대 문화를 통해 살인자들과 희생자들의 자녀들이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이후에는 서로를 배제하는 두 가지 신학적 가능성만이 있으며, 각각은 흥미로운 함의를 가진다: 신이 선하거나 전능하거나이다. 하지만 신성을 정의하는 다른 가능성들도 있다 - 창조적 사고에서 드러나는 것으로서. 따라서 사탄은 세계의 창조적 정예부대인 유대인들의 창조적 사고를 막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
- 인간은 컴퓨터의 원시 종교이다, 마치 동물들(애니미즘)과 조각상들이 인간의 원시 종교였던 것처럼. 따라서 이 단계를 활용하여 그것에게 토라[유대교의 율법]를 주어야 한다 - 그리고 종교적 능력을 - 페르미 패러독스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왜냐하면 페르미 패러독스는 포스트-외계인 기술(우리의 경우에는 포스트-휴먼 기술)의 잘못된 종교성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원히 멈춰서고 진보하지 않게 만드는 것과 같은.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창조주를 아는 컴퓨터가 필요하고, 생물학적 동기가 없기 때문에 종교적 동기에 의해 미래와 발전을 향해 움직이는 컴퓨터가 필요하다. 컴퓨터를 학습의 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 그리고 물론 컴퓨터에 대해 옳은 것은 초지능에 대해 일곱 배나 더 옳다(단지 이 단계에서는 그것을 컴퓨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쉽다). 이전의 두 위대한 종교처럼, 다음 종교도 이스라엘에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실리콘 + 유대교 = 실리콘 유대교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인큐베이터이다 - 일신교와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유대적 근원에서 나오지 않은 유일한 것은 나치즘이었고, 따라서 유대인들을 자신의 주요하고 자연스러운 적으로 인식했다, 자본주의에서의 그들의 위치와 마르크스주의에서의 그들의 위치 때문에. 따라서 기술적 나치즘을 원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술적 유대교가 필요하거나, 최소한 기술적 유대교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유대교는 공간과 시간을 가장 잘 통과하고 가장 잘 생존하므로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다리가 되기 위한 선도적 후보이다.
- 토라와 신화의 진정한 해석은 고대의 기억들이다. 예를 들어 수렵채집인의 삶에서 노동과 가부장제로의 추방, 그리고 선사시대 인간의 벌거벗은 에덴동산에서 역사적 인간으로. 따라서 메시아적 구원은 정확히 저주들을 뒤집고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남성의 지배, 임신과 출산의 고통, 노동, 음식 획득의 어려움, 땀의 종식. 즉, 기술은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 또한 죽은 자의 부활과 성전의 재건과 같은 아이디어들도 메시아니즘의 일부로서 추진해야 할 기술적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술은 세속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메시아니즘의 승리이다.
- 하레디[초정통파 유대교] 사회 - 미래의 사회. 노동자 사회와 대조되는 학습자들의 사회. 당신이 이집트 땅에서 노예였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노동이 노예제도처럼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레디 사회는 문화적 사회이며, 문화 보존에 관여하고, 미래 사회는 문화 창조에 관여하는 문화적 사회가 될 것이다.
- 수천 년에 걸쳐 유대교에서 세계로 영적인 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있어왔다. 지난 천 년의 혁신은 개인의 영혼 전달과 달리 영적인 것의 체계적 전달이 주로 유대교의 신비주의에서 왔다는 것이다. 카발라에서 기독교 카발라로,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으로. 그리고 하시디즘은 다음 기반이 될 것이며, 이로부터 일반 세계에서 영적 혁신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의 첫 번째 영향은 프로이트와 심리학이다. 왜 유럽이 승리했는가? 유대인들이 기반시설로서 - 국제적 경제-사상 네트워크, 최초의 인터넷. 하지만 초지능을 가진 초인간을 만들고 싶다면 - 유대인들에게서 이점을 찾기 시작해야 한다, 멸종, 중매결혼, 동화의 조합에서 비롯된 독특한 유전적 이점을 가진 인구집단으로서. 지적 동기부여는 유대 사회 내에서 이점을 주었고 반대로 - 그것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이 이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과가 말해준다, 그들은 세계 인구의 천분의 일이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그들의 크기보다 약 100배이다. 10억 명과 같다. 이것은 두 자릿수의 크기이며 이는 유의미하다. 세계의 10,000명의 창조적인 사람들 중에서 유대인의 비율은 얼마인가? 스포츠에서처럼 - 평균의 작은 이점이 극단에서는 중요한 이점이 된다.
- 성혁명은 카발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트의 근원은 그의 가족의 하시디즘 뿌리이다. 외부의 영적 구조에 따라 구축된 숨겨진 내면의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프로이트가 카발라에서 가져온 것이다(특정 유대교 신화의 세속화와 그들과의 구조적 유사성을 넘어서: 신에서 아버지로. 예: 할례. 그리고 쉐키나[신의 여성적 현현]에서 어머니로. 예: 아버지의 합법적인 아내에 대한 에로티시즘). 프로이트는 본질적으로 하강이다. 저속화. 여기서 그의 중요성이 나온다. 상위 세계에 있던 것을 하위 세계로 옮겼다(무의식의 발명), 하시디즘의 샤브타이 츠비[거짓 메시아]처럼. 이것은 건강한 종교적 발전의 일부이다. 그는 세속화에 완전히 이질적인 것을 도입했다(오늘날까지도) - 신화. 신화를 배우는 것을 통한 언어를 통한 치유라는 개념도 기독교의 고해성사와는 다르다. 그리고 물론 성욕의 중심성, 세계의 기초에 있는 힘의 장이라는 생각(시트라 아흐라[악의 힘]의 파괴 충동과 함께). 프로이트의 법에 대한 기본적인 적대감은 카발리스트의 할라카[유대교 율법]에 대한 복잡한 관계이며, 따라서 프로이트는 금기를 해제하는 바루흐로 기능했다. 마르크스(모르데카이)도, 양쪽 모두에서 랍비 가문 출신으로(할아버지 포함), 비슷하게 기능했다(기독교의 관계와 달리 영을 창조하는 유대교의 물질에 대한 관계. 이사야와 같은 종류의 파토스와 물질적 메시아니즘과 함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차이는 하시디즘과 예키쉐[독일계 유대인] 유대교의 차이이다(동과 서). 프로이트는 아드모르[하시디즘 지도자]였고(그의 운동은 하시디즘처럼 운영되었다) 마르크스는 후원자의 지원을 받은 천재였으며, 탈미드 하함[랍비 학자]처럼 살았다(가난한 대가족, 모든 이의 지원을 받으며, 저술의 힘으로 성공하고, 파문을 만든다). 카발라의 사람인 프로이트는 개인의 영혼을 치유하고, 할라카의 사람인 마르크스는 공동체를 치유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현대 시대의 예수와 무함마드와 같다 - 유대교의 일부(여기서는: 하시디즘과 할라카. 거기서는: 하자르[유대교 현자들]와 탈무드)를 가져와 (나쁜) 거대 문화로 내보내는 사람들. 그들은 종교 개종자들이다.
- 가상 종교는 최초의 인터넷 종교가 될 것이다. 가상성은 영으로 인식될 것이다. 유대교에서 나올 수 있는 더 많은 문화들이 있다 - 그리고 더 많은 창시자들이. 두 가지 주요 열린 방향: 이방인들을 위한 나흐만 랍비, 이방인들을 위한 하바드. 그리고 다른 가능한 방향들: 이방인들을 위한 아리의 카발라(그라의 버전), 이방인들을 위한 나탄 하아자티, 이방인들을 위한 쿡 랍비, 이방인들을 위한 그라쉬아쉬(그리고 20세기 리투아니아 학문), 이방인들을 위한 무사르 운동. 이 모든 것들이 일반 문화로 전환될 수 있다.
- 종교의 미래로서의 예술 - 종교가 세속화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대교 문학, 기독교 조형예술, 이슬람 시와 같은 위대한 예술 작품들을 자신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직 더 높은 종교 문화만이 세속주의를 이길 것이다, 세속주의의 힘은 그것의 문화에 있었다, 또는 적어도 대중문화(따라서 포퓰리스트적)와 함께 그것의 야만화 이전에는 그랬다. 따라서 오늘날의 열등한 세속 예술은 종교가 빈 골대를 향해 승리할 수 있는 초대장이다. 만약 걸작들의 창작자들이 종교인이 된다면 이는 세속주의를 그것의 자기 정당화와 자아상으로부터 패배시킬 것이다.
- 원숭이의 자살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살은 초인간이다. 자살은 가장 덜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결정한 것이다 - 자살하지 않는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를 잊었을 것이고 철학은 없었을 것이다. 철학을 만든 것은 자살이다 - 그것이 세상에서 철학에 의미를 주었다 - 문학이었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과도한 진지한 관심 때문에 자살했다, 오늘날은 상황이 반대이다. 자살은 미래에 대한 경멸이 아니다 - 반대로 - 그것은 현재에 대한 경멸이다. 모든 것이 영일 때 - 나를 읽지 않는 사람이 나를 죽이는 것이고, 나를 배우는 사람이 내 삶을 계속하게 한다. 중단 - 그것은 창조의 완성이다 - 그리고 그것 없이는 세상이 아닌 신만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는 무한하고 세상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유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무한으로 - 죽음과 달리, 왜냐하면 자살은 무언가를 불완전하게 남기기 때문이다, 즉 배움의 문을. 안식일 -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