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은 무엇일까? 글로벌 테러리즘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은 무엇일까? 평평한 지구가 지구본으로 바뀐 것처럼, 직선적인 정치 축을 어떻게 원형으로 구부릴 수 있을까?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은 무엇일까? 현 시대에 필요한 철학자-왕의 대응물로서의 철학자-재벌 모델과, 공작새의 꼬리처럼 탐색 트리에 관하여. 인공지능 시대가 인공 사고를 가져올 때, 새로운 인공 철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할 것이다
포퓰리즘을 막는 창의성 교육
테러리즘은 창의적 실패다. 극단주의는 "더 많은 같은 것"의 문제다. 젊은 남성들은 알파 남성의 기억 아래, 권력에 대항하여 창의적 출구를 찾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들은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것을 하고 싶어 하는데,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시도되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다. 사고가 축에 갇혀 있다는 것 자체가 극단화를 만들어내는데, 차별화가 가능한 유일한 곳이 극단이기 때문이다. 반면 진정한 창의적 해결책은 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창의적 사고는 극단화를 막는다. 그것은 축에 수직인 방향, 즉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축을 찾는다. 따라서 정치 지도가 단순히 좌우가 아닌 네트워크였다면, 즉 다차원적 구조였다면, 대중의 상상력은 달라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 축, 종교적 축, 경제적 축으로 구성된 구조로 배열하면, 누락된 가능성들이 보이고 창의적 사고가 생겨났을 것이다. 즉 이미지의 추상화가 위험한데, 이것은 오히려 중도가 하는 일이다. 젊은이들이 나이 든 사람들보다 더 극단적인 것은 그들이 축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이 중심에 있는 축을 그리기 쉽고, 따라서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교착 상태는 한 축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좌우의 이미지는 정치 체제를 망가뜨리고, 어떤 초기 상관관계로 인해 많은 축이 한 축으로 불필요하게 합쳐지게 만들며, 정치적 정체성을 교착 상태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구축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축 위의 위치로 표시되고 줄다리기 경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극단주의와 체제에 대한 절망, 갈 곳이 없다는 느낌, 창의성이 없다는 느낌을 조장한다. 성장할 창의적 해결책은 정치적 문제에 제안될 기술적 해결책이 될 것이다 - 기술의 정치학이다. 기술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될수록, 그것은 더욱 중립적이지 않은 정치적 요소가 될 것이며, 서로 다른 정치인들이 다른 기술적 응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고, 민주주의는 기술 적용의 방향을 선택하고 결국 그 발전 방향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있는 사회를 구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미래의 큰 정치적 논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처럼 세계를 다른 사회들로 나눌 것이다. 중국의 인공지능은 미국의 것과 다를 것이며, 경쟁이 끝나면 기술 정치의 문제를 해결한 우수한 사회들이 결승선에 도달할 것이다. 첫 단계에서는 인간 사회와 인공지능을 통합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형태가 될 것이다. 마치 인간과 말의 통합처럼, 그들의 공동 작업에서 최대한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다. 농업혁명에서처럼, 가축이 인간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생태계에서 다른 작업을 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최적의 노동 분업과 통제 형태를 찾는 것이 과제가 될 것이며, 만약 이것이 한쪽 끝에는 인간, 다른 쪽 끝에는 컴퓨터가 있는 축으로 단순화된다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우파는 인간의 통제를, 좌파는 컴퓨터의 통제를 지지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힘겨루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인간보다 강한 것처럼. 그것이 사고의 말이다. 그리고 소가 식물을 고기로 바꾸는 데 인간보다 효율적인 것처럼 사고의 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사고의 동물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은 길들여지고 훈련될 것이다. 인공지능 혁명은 산업혁명이나 과학혁명, 정보혁명보다는 농업혁명에 더 가까울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기계나 장치가 아닌, 새로운 종류의 동물들과의 대면과 길들이기를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추진하는 정치의 실패
지도자들은 혼돈 속에서 일하는 법을 모르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중이 혼돈 속에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이 진전되지 않는다. 해결책을 위한 계획이 있기를 기대하지만, 올바른 것은 계획이 없다고 선언하고,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해결책을 위해 연구에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다. 현재의 비효율적인 해결책에 투자되는 추가 자금은 낭비되고 있으며, 직접적이고 알려진 해결책 대신 연구에 투자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전문가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모아 인류의 싱크탱크를 만들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연구와 기술적 해결책에 자금을 지원했어야 했다. 이는 수십 년의 연구가 걸릴 수 있었지만,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연구가 정치적 의제가 되려면 혼돈 속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연구는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임에도 불구하고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업 계획이 아니고, 투자에 선형적이지 않으며, 예측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가상의 문제들이 결국 정치가 아닌 기술에 의해 해결되지만, 정치인들은 연구를 혼돈으로 보고 (그들은 혼돈 속에서 일할 줄 모른다) 어쩌면 올 수도 있는 마법의 해결책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기술 발전이 우연히 이루어진다는 환상이 있다. 문제 해결에 집중된 재정 투자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연구에 투자할 때도 연구의 본질에 반하는 계획에 투자하기 때문에, 때로는 도움보다 해를 더 끼친다. 올바른 것은 다양한 분야의 최고의 두뇌들을 모아, 함께 두고, 그들에게 돈을 쏟아붓는 것이다. 그들 사이의 충돌과 지적 경쟁에서 좋은 것이 나올 것이다. 과학자들은 충분한 연구와 증거가 있을 때 올바른 해결책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데 다른 이들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다. 이것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올바른 방법이다. 두뇌들, 연구들, 그리고 과학적 합의의 형성이다. 항상 반대자들이 있더라도 주류가 있다. 철학자-왕이 아닌 과학자-왕, 더 정확히는 과학 공동체가 필요하며, 그들의 특성을 정치 공동체로 옮겨야 한다. 과학에 정치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들은 연결된 현상들이며 우리는 이미 그중 하나를 잘 하는 법을 배웠다.
문학적 오류로서의 탈무드
재벌들에 대한 오류는 사회가 부를 소유한 돈의 양으로 측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적으로 한 개인의 손에 있는 대기업과 같은 거대하고 발전된 부의 구조의 존재가 불평등의 환상을 만든다. 하지만 사실 재벌은 자신의 부를 실제로 활용할 수 없다. 마치 왕이 자신의 왕국을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왕국의 모든 여성과 잘 수 없듯이, 그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낭비하느냐, 즉 경제에서 얼마나 많은 비생산적 부패가 일어나느냐이다. 여기서 일반인들도 낭비하지만, 재벌도 돈을 경제에 투자하는 대신 금으로 된 변기를 사면 죄를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소비나 낭비의 정신이 아닌 경제적 정신이다. 이 정신은 효율성을 신성시한다. 즉 모든 잉여가 진보와 발전을 위해 투자되는 지수적 성장을 의미하며, 쾌락주의나 다른 비효율적 할당과는 반대된다. 경쟁도 효율성을 높이기 때문에만 중요하지, 일차적 이상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진보가 좋지 않더라도 각자가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이 이득이 되기 때문에, 즉 게임 이론 때문에 - 진보는 불가피하다. 믿음은 진보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역사의 내적 논리이며 우리 모두는 아이가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미래에 살고 싶어하고, 사람은 이기든 지든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행동한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학습을 수행하는 정보 기계로서. 진화 자체처럼,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진보하지는 않지만 항상 진보할 것이다. 발전은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며 별들과 은하를 만들었다. 이것은 시간의 본질과 순간 이전의 것으로부터 나오는 물리 법칙의 본질에서 오는 것이다. 즉 요소들에 작용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따라서 일부 초기 조건에서 복잡성이 생겨나고 계속 증가할 것이다. 미래는 마침내 단순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해질 것이다. 복잡성의 증가는 복잡한 시스템의 법칙이다. 즉 처음부터 복잡성을 만드는 요소가 있었던 시스템의 법칙이다. 단순한 시스템만이 안정적이다. 중세의 문제는 일신교로 인해 복잡성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즉 탈무드와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서 그 자체의 복잡성은 점점 더 커졌지만, 그것이 버려졌을 때 그것은 불모의 복잡성의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수학의 불모의 가지처럼 깊은 복잡성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했다). 때때로 시스템이 잘못된 방향으로 복잡성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진화에서처럼,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때만 트리의 잘못된 가지에서 깊이 검색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검색을 하고 그것이 불모였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만 알 수 있다. 검색 알고리즘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 그것은 실수한다. 거의 항상 실수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와 고급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항상 실수다. 그것이 검색 알고리즘이라는 본질에서 (낮은 문화에서처럼 최적화가 아닌). 따라서 연구에 대한 돈도 거의 항상 잘못된 방식으로 투자될 것이지만, 이를 건너뛸 방법은 없다. 이것이 긍정적인 낭비이며, 재벌들 못지않게 모든 사회가 앓고 있는 과시적 소비의 부패한 낭비와는 반대되며, 자본에서 낭비되는 비율 면에서는 오히려 더 심하다. 그리고 연구와 실험에는 매우 적은 투자만 한다. 실험적 사고는 거의 완전한 시간 낭비다 - 그리고 이것이 그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특정 영역에서 낭비보다 더 높은 효율성이 없다면 - 그것은 여기에 창의적 도전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신은 재벌이나 부르주아의 과시적 낭비가 연구 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