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의 빛바램
아그논의 닻
아그논은 왜 이 이름을 선택했을까? 이는 샤브타이주의 [유대교의 신비주의적 운동] 못지않게 대담한 카발라적 [유대교 신비주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 신성과 신의 결합 관계에 대해서다. 이러한 개념은 아그논식 모더니즘의 근원이기도 하며, 종교적 세계 밖에서도 인정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강제성이라는 명백한 요소와 의지라는 숨겨진 요소, 그리고 어떤 내재된 불가능성과 희망, 그리고 무익한 기대가 있는 일방적 결속, 즉 전통적 용어로 '아구나' [결혼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상태]는 아그논을 현대적 부조리의 근원과 연결시킨다
저자: 아구나 해방자
죽은 신화와 아구나 관계를 유지하며 - 해방되지 못함 (출처)
아그논은 그의 이름처럼 아구나, 즉 이미 그곳에 없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다룬다. '시라'에서처럼, 또는 전통에 대한 그의 순진한-냉소적인 태도에서처럼, 혹은 이미 사라진 마을로부터, 또는 블라크로부터, 또는 블루마로부터, 또는 과거의 어떤 부정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은 그에게 있어 더 이상 진정으로 살아있지 않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포괄적이고 중심적인 세계관이며, 이로부터 카프카와의 유사성이 나오고, 개인적 차원에서도 끝맺음을 하거나, 이혼을 하거나, 포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또한 유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민족적 관점과도 연결되지만, 가장 대담한 점은 신과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관계를 결혼이나 약혼 또는 이혼이 아닌 - 아구나 상태로 보는 관점이다. 부재하는 신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 - 그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 사실, 그는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남겨두고 사라진 이후로, 그들이 죄를 지었고, 그가 돌아온 때부터, 계속해서 사라지고 부재하려 한다. 시나이 산에 올라가 돌아오지 않은 모세처럼, 매번 그는 세상을 떠나고, 그들이 죄를 지을 때 돌아온다.

아그논은 신화성에 직접적으로가 아닌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도와 에남'과 '영원까지'에서처럼 연구의 손수건을 통해서만 그것을 만질 수 있었다. 숄렘 [게르숌 숄렘, 유대 신비주의 학자]도 연구를 통해 그것을 만질 수 있었고, 직접적으로는 아니었으며, 아그논은 그의 길을 따랐다 - 하지만 직접적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야기책'에서도, 초현실주의적 구절에서도 아니었다. 현대 히브리 문학은 더 이상 신화에 접근할 수 없다. 아그논에게서도, '마지막 말'의 샤브타이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잃어버린 신화로부터 추방되었다.
미래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