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의 빛바램
미래의 독서법
왜 예술을 창작자로서만 읽어야 하고 소비자로서는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예술가를 그의 작품 속에서 한 개인으로 만나기를 원치 않고, 방법론을 보여주는 자로서만 - 즉 체험자가 아닌 학습자로서만 - 만나려 하는가? 왜 그토록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사생활에서는 보잘것없는 악당인지에 대한 이유를 논하다
저자: 천박한 장르로서의 예술가의 초상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자화상 - 단순한 가죽으로서 [번역자 주: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바르톨로메오의 벗겨진 피부에 자신의 얼굴을 그림] (출처)
텍스트는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처럼 쓰는 법을 가르치며, 텍스트의 내용은 이 학습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그것은 특정한 형태의 창의성, 글쓰기 방법론을 가르치며, 이것이 독서와 학습 접근법의 차이다. 즉, 이는 학습 시대에 적합한 독서 방식으로, 특정한 활동 방식, 특정한 창의성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지, 특정 내용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특정 인물과의 소통은 더더욱 아니다. 단, 그 사람을 문학 교사로서 대하는 경우는 예외인데, 이는 곧 학습을 의미한다.

우리가 글쓰기의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개인주의가 쓰레기라는 것이다. 예술가라는 개념이 예술을 망쳤고, 작가라는 개념이 문학을 망쳤다. 화가, 저술가라는 말이 더 낫다. 예술가 자신이 주제가 된 순간, 그것이 종말의 시작이었고, 모든 작품에 전기적 해석을 강요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저속한 정점이 정체성 정치 예술이다).

예술이 표현 도구로 정교해지면서 일어난 일은, 예를 들어 회화에서 (건축에서는 덜 일어났지만), 미켈란젤로처럼 자신을 단순한 가죽으로만 그린 장인에서, 카라바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여러 그림의 등장인물이 되었고, 렘브란트에 이르러서는 이미 많은 그림의 주제가 되었으며, 반 고흐에 이르러서는 신화적 서사가 누적되는 유일한 주제가 되어버렸다. 역설적으로 예술의 성공으로부터 과대망상이 자라났고, 그것은 결국 오만과 예술적 비극으로 끝났다.

자아 찬양은 추하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기생충들과 자아 문제가 있는 이들, 재능 없는 이들, 사기꾼들, 자기 홍보에만 능한 이들을 예술계로 끌어들였다. 모든 파리가 똥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연예계가 그 파리들을 끌어들여야 하고, 예술은 더 이상 변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파리들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의 똥으로서의 흡인력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이 분야를 범람시키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오직 그릴 줄 알고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그리고 그리는 법을 배우고 연습한 사람만이) 해야 하며, 그 어떤 예술가도 예외는 아니다.
미래의 철학